THE CHIN-TAN HAK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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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013-4719
Published by: The Chin-Tan Society (10.3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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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Yang Yun
Published: 31 December 2021
THE CHIN-TAN HAKPO, Volume 137, pp 65-101; https://doi.org/10.31735/cth.2021.12.137.65

Abstract:
이 글에서는 『三國遺事』 万(萬)波息笛조 및 그 유관 문헌에 담긴 『周易』의 상징성을 살피고자 하였다. 이전까지 해당 조목은 특히 利見臺와 관련하여 乾卦의 상징성을 중심으로 분석되었다. 그렇지만 『高麗史』에 실린 「利見臺歌」와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인용된 感恩寺 「寺中記」에서 미루어 볼 때 ‘이견대 설화’의 원전은 현재의 만파식적조와 일정한 차이가 있었으며, 문헌 정립 과정에서 설화에 일정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또한 682년설과 690년설이 병존함으로부터, 만파식적·이견대 설화가 중층적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주역』 「說卦傳」을 참조하여 감은사가 乾卦, 이견대가 震卦에 대응하는 공간이며, 만파식적·이견대 설화가 최초에는 690년 5월 8일(夏至) 전후를 중심 배경으로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후 이러한 구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巽卦의 상징성 및 曆日·卦爻의 변화에 대한 인식을 반영해 682년 5월을 배경으로 재구성된 결과로 보았다. 이후 震卦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만파식적·이견대 설화의 1차적 형성은 中代 神文王 대로부터 멀지 않은 시점에 이루어졌다고 이해하였다. 이 1차 텍스트는 下代 元聖王 대에 변형되었으나, 그에 대한 반발을 수습하고자 9세기 초 2차 텍스트가 작성된 것으로 보았다. 그 작성 주체는 金庾信 一家였을 것이며, 이들은 이를 통해 중대에서 하대로의 이행을 震卦에서 巽卦로의 이행에 유비하려 하였다고 여겨진다. 이는 신라 내에서의 易學의 성숙을 반영하며, ‘The Book of Changes’라고도 번역되는 『주역』의 ‘변화’ 개념을 내면화한 것으로도 헤아려진다.
Sang-Hoon Lee
Published: 31 December 2021
THE CHIN-TAN HAKPO, Volume 137, pp 169-191; https://doi.org/10.31735/cth.2021.12.137.169

Abstract:
현전하는 한글본 『사소절』은 총 3종이다. 이들은 각각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단국대학교 율곡기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중도본과 규장각본은 선행 연구를 통해 학계에 이미 소개된 바 있으나 단국대본은 이 글에서 최초로 소개하는 것이다. 국중도본은 『사소절』의 ‘婦儀’ 편만을 번역한 책이고 규장각본은 『사소절』의 ‘士典’ 편 중에서 ‘성행’부터 ‘교접’까지 번역한 책이다. 새로 발굴된 단국대본은 『사소절』을 抄略하여 번역한 책이다. 이 글에서는 한글본 3종의 서지, 필사 및 언해의 특징, 그리고 국어학적 특징을 표기, 음운, 형태, 어휘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한글본 『사소절』의 발굴은 『사소절』이 널리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국어사적으로는 19세기 후기의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었다는 점과 다양한 어휘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Kyeong Jin Yoon
Published: 31 December 2021
THE CHIN-TAN HAKPO, Volume 137, pp 31-63; https://doi.org/10.31735/cth.2021.12.137.31

Abstract:
이 연구는 唐 高祖 시기 삼국의 대당 외교 현안으로 함께 제기된 朝貢路 차단과 상호 侵伐 문제가 실제는 소송 주체와 시기가 다른 별개의 사건임을 확인하고, 이것이 『三國史記』와 『舊唐書』 등 여러 사서에 하나의 상황처럼 정리된 배경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고구려의 조공로 차단은 백제가 당과 연대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백제가 소송을 제기하자 당 고조는 626년 朱子奢를 파견하여 화해를 종용하였다. 상호 침벌은 백제와 신라의 갈등으로서 627년 태종은 백제에 璽書를 보내 역시 화해를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태종은 삼국의 사신이 모인 기회를 이용하여 會盟을 통해 삼국의 화해를 도모하였다. 이로 인해 별개의 사건인 조공로 차단과 상호 침벌이 하나의 사적으로 인식되면서 史書와 편목마다 기사의 변형이 발생하였다. 『구당서』 고려전은 조공로 문제에 신라를, 침벌 문제에 고구려를 끼워 넣음으로써 당시 상황을 고구려와 신라의 갈등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이것은 태종이 고구려 원정의 한 명분으로 고구려의 신라 침공을 내세운 것과 연결된다. 삼국사기는 이 내용을 채용하면서 신라 중심으로 편집하는 경향을 보였다.
Sungjun Yeum
Published: 31 December 2021
THE CHIN-TAN HAKPO, Volume 137, pp 195-222; https://doi.org/10.31735/cth.2021.12.137.195

Abstract:
본 연구에서는 종교적 초월성과 정치의 분리 그리고 그로 인한 ‘정치의 세속화’와 ‘정치의 비종교화’가 야기하는 근현대 정치의 문제에 주목한다. 마루야마마사오(丸山眞男)는 『日本政治思想史硏究』(Studies in the Intellectual History of Tokugaqa Japan(1974))에서 일본 근대 정치사상의 역사에서 주자학의 리(理)의 초월성과 정치가 분리되는 과정에 주목하여 정치와 종교의 연결 고리가 해체 되어가는 과정을 추적하여 메이지시대의 일본 정치가 ‘괴물’로 전락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신적 초월성은 서구 근대 17·18세기에 국가, 정치 그리고 법과 긴밀한 내적 연관성을 유지하였으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이르러 이러한 관계가 해체된다. 카를 슈미트는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1934))에서 신적 초월성과 정치의 분리와 해체로 인해 유럽의 근대 정치에서 국가 권위의 추락, 정치의 세속화, 법형식주의와 법실증주의의 폐단을 비판한다. 정교분리(政敎分離)가 상식이 된 시대에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한다는 것은 정치사상사의 담론에서 논의의 시작조차 불가능하게 할 만큼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의 기후위기와 같은 전지구적 문제가 일국의 국가 단위로서는 해결할 수 없으며 국가와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연대와 협력을 위한 세계시민적 정치를 요청한다는 점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종교적 초월성은 현대 정치 담론에서 진지하게 고려될 수 있다.
Young-Jun Cho
Published: 31 December 2021
THE CHIN-TAN HAKPO, Volume 137, pp 103-128; https://doi.org/10.31735/cth.2021.12.137.103

Abstract:
조선후기의 대표적 물명서인 유희의 『물명고』를 대상으로, 분류 체계에 대한 이해의 개선을 시도하고 항목별 집계를 수행하였다. 분류의 위계와 관련하여, 기존 연구의 "2단계" 가설에 문제가 있음을 밝히고, "3단계" 이상의 위계를 적용해야 함을 보였다. 그에 따라, 분류 체계를 재구성하여 전체 어휘를 새롭게 집계하였으며, 표제항, 준표제항 등으로 구분하여 셈함으로써, 이본마다 다르게 제시되었던 수치의 문제점을 개선하였다. 표제어의 성격과 관련해서는 성별, 방위, 계절, 연령, 규격, 색상 등을 기준으로 한 사례를 거론하여 중국 문헌의 영향이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집계된 수치를 근거로 하여 동의어, 외국어, 안어 등의 분포를 고찰하고 빈도에 따른 특성을 살펴보았다. 『물명고』에 대한 수량 분석을 통해 유희의 사고체계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당대인에 대한 지성사 연구를 위한 바탕이 마련되었다. 향후에 본 연구에서 활용한 방법론을 『재물보』, 『광재물보』 등을 비롯한 유사 자료 및 『본초강목』, 『설문해자』 등의 중국 문헌에까지 확대하여 적용하게 된다면, 『물명고』의 온전한 이해를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가 축적될 수 있을 것이다.
Jibok Yoo
Published: 31 December 2021
THE CHIN-TAN HAKPO, Volume 137, pp 129-167; https://doi.org/10.31735/cth.2021.12.137.129

Abstract:
이 연구는 김태석이 궁내부 소속 제실미술위원으로서 일·청에 파견되었던 1908년에 주목하여 당시 미술시찰의 결과로 동경에서 출판한 《乘槎印譜》와 북경에서 출판한 《淸游印譜》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김태석의 두 인보는 미술품으로서 외견상 두 가지 큰 의미를 지닌다. 국내 전각가로서는 석판인쇄라는 근대적 출판기술로 만든 최초의 인보라는 점이고, 傍刻의 전문적 형태를 최초로 보여주는 인보라는 점이다. 두 인보는 모두 당시 동경과 북경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서·발문과 인영을 싣고 있다. 특히 《승사인보》에는 메이지시대 일본 전각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의 평가가 실려 있어 근대기 한·일 전각계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청유인보》에는 袁世凱의 휘하에 있던 청말 관료들의 인장이 실려 있어 이후 김태석이 원세개 총통의 인장과 중화민국 국새를 새기게 된 배경을 짐작케 해준다. 두 인보는 김태석 개인의 포트폴리오적 성격이 짙게 드러난다. 그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무릅쓰고 인보를 제작했던 이유는 인보를 자신의 커리어에 적극 활용함으로써 이국에서 망국의 예술가로서 생존을 도모하고자 했던 의도였다. 이 논문에서 주목할 점은 1908년 당시 대한제국은 미술 자체만을 목적으로 한 시찰을 공식적으로 진행하고 있었고, 그 미술 안에 전각과 인보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Hyeon Beom Cho
Published: 31 December 2021
THE CHIN-TAN HAKPO, Volume 137, pp 255-289; https://doi.org/10.31735/cth.2021.12.137.255

Abstract:
본고는 일제하 조선 천주교를 대상으로 하여 식민지 근대라는 맥락 속에서 종교 고유의 영역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초자연이라는 범주가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였는지를 탐구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천주교의 종교활동 가운데 이른바 성체와 관련한 종교적 실천을 사례로 다루었다. 성체를 예수의 실제 몸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교리의 학습이 『천주교요리문답』과 같은 교리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과정, 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영성체를 실천할 때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규범들을 익히는 과정, 미사에 참례하면서 영성체를 행하는 훈련들, 그리고 성체에 대한 공경에 사실성의 후광을 드리우는 서사들, 이른바 성체 기적 이야기들을 유포하는 방식 등을 분석하였다. 또한 천주교에서 성체 공경을 통하여 강화하는 종교성의 훈련이 식민지 근대라는 환경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좀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종교적 초월성의 사회적 구성 과정을 조명하였다. 먼저 종교 범주의 성립에서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자연과 초자연의 구획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이어서 종교적 초월성이 근대 국가의 세속성과 타협점을 이루는 방식으로서 정교분리의 원칙이 담론의 차원에서 그리고 개별 종교의 차원에서 어떻게 관철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아울러 종교적 초월이 제도적 종교계나 사회적 통념의 틀을 벗어나서 요동치거나 범람하는 현상이 존재하며, 이것은 종교 범주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에는 분명하나 그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교란 작용을 벌이기도 한다는 점을 일제하 개신교의 신비 운동이나 현대 천주교의 신종교 현상을 사례로 하여 설명하고자 하였다.
Hyun-Su Oh
Published: 31 December 2021
THE CHIN-TAN HAKPO, Volume 137, pp 1-30; https://doi.org/10.31735/cth.2021.12.137.1

Abstract: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 이전 요서의 비파형동검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7세기 경 제나라 환공이 연나라 북쪽의 산융을 공격하면서 일부 산융인들이 요서지역으로 이동하여 재지의 조선인들과 결합하였다. 결합된 이들은 고대 중국에서 북방 족속의 차원에서 맥으로 불렸고, 요서의 원 고조선인들은 요동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의 명맥을 이어간다. 맥(발)과 조선은 이후 연합 관계를 형성하면서 맥이 요령 지역의 거주민으로 인식되었다. 맥은 전국시대에 들어서서 같은 북방의 족속인 호와 연칭으로 불리면서 胡와 貊의 의미가 서로 상통하게 되었다. 호와 맥을 동일시하는 특정 시기 및 특정인의 인식으로 호와 맥 관련한 기록이 혼란하게 되어 기록자에 따라 연나라가 격파한 요서의 정치 세력을 호의 동호나, 맥의 조선으로 각기 달리 기록된다. 한편 예는 처음에 산동성 북쪽 ~ 발해 인근에 거주했었는데, 전국시대 연나라가 고조선 지역을 침입할 때 ‘중국 동북방 말단의 濊’라는 인식이 요령 지역에 덧붙여지면서 요령지역 발조선의 거주민인 맥과 결합되어 예맥으로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 혹은 예맥족을 기본 바탕으로 한 고조선은 문화적 혹은 정치적 연결고리로서 대내 교섭망을 형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대외적인 교섭 관계를 맺게 된다. 기원전 6~5세기 요서의 맥족과 요동의 조선은 남동구유형과 정가와자유형을 중심으로 하여 요서와 요동 지역에 걸쳐 광역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주변의 세력들과 비파형동검 관련 문화를 매개로 하여 활발한 교섭 관계를 전개하였고, 동남구-옥황묘문화 권역과 하가점상층문화 권역, 그리고 중국 권역과의 교섭 양상도 보인다. 전국시대로 넘어가면서 발조선은 노야묘-윤가촌식동검 계열의 문화로 변모되었으나, 곧 이어서 연나라가 요령 지역에 진출하면서 요령의 토착 사회는 연나라 중심의 교섭 관계로 바뀐다. 예맥의 교섭망이 다시 고조선 중심으로 연결된 것은 위만조선 시기이다. 위만조선은 진번·임둔·옥저 등 주변세력들을 통합하고, 漢나라, 흉노, 남쪽으로는 辰國 등과 교섭관계망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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